+아쉬운 생존마감

[한글 뜯어먹記] ㅁ, 막힌 공간의 추억에 대한 단상

DkTheBlank 2012. 6. 5. 15:05




1.
사각의 공간, 막힌 곳들의 한계 속에서 나는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굶고 있었다. 단단한 벽, 빽빽한 어느 곳에도 틈은 없었고 틈이 있더라도 바깥의 빛에 휘둘리지 않을만큼 내벽內壁의 빛이 강했다. 그런데도 여기는 밝았다. 이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방이 막혔다면 거칠지 않은 곳은 위와 아래밖에 없었다. 꽉막힌 곳, 그러나 위와 아래에서 내리쬐는 이 빛에는 한계가 없어보였다. 과연 위에서 내린 빛이 반사되어 아래를 가득 매운 것인지 아래에서 투사된 빛이 천장(이라 불릴법한 윗공간)을 콕콕 찌르는 것인지 알 길 없었다. 이건 그저 빛이었다. 헤어나오려 노력할 수 없이 나마저 가득 역易매워져버린 그런 빛. 항성의 맑은 그것이 어디에서나 나를 비추고 있었고 바라보고 있었다. 끝없는 감시도, 그와 함께.


저 구석에는 어떤 사람이 어떤 시선을 줬을까, 혹시 내가 그 첫사람은 아닐까. 고딕양식은 신에 대한 복종의 웅장한 표현이라는데 저 구석의 다단들은 어떤 의미를 준 것일까. 저곳의 이끼같은 녀석들은 과연 살아있기는 한 것일까, 아니 지금 나는 살아서 저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상상일 뿐일까. 나는 누구일까. 지금 무엇을 하며,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 중일까.





이 빛이 하얀빛이던가, 아니면 어떤 색인지 잘 모르겠는 공간 속에서 나의 위치를 파던 순간 갑자기 아랫배가 아팠다. 아랫배가 아프다는 느낌에서 '아랫배'는 이 빛 속에 어디일까. 과연 여기가 아래이기는 할까. 공간에 대해  오랜만에 심각한 고민을 하던 찰나였기에 이 신호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이 배가 과연 어떤 배일까, 화장실가는 그 배일지 생각해보던 중 이미 그 신호는 사라져버렸다. 이 모호한 것(신호)들은 과연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어떤 신호들인가.




멀리서 비린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맡아본 냄새,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갔던, 초량에 있던 조그만 동물원에서 아주머니께서 코뿔소 배설물 위에 뿌렸던 락스의 고약한 냄새가 떠올랐다. 얼마나 지독하고 매스꺼웠는지 점심깨 먹었던 콩국수와 요구르트도 다토했던 느낌까지의 연속, 그 감흥이 이 공간 어디에선가 번지고 있다. 밝은 위와 아래, 그러나 어느 구석이나 어두웠고 어디에서 과연 이런 냄새물질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질 무렵 음산한 기운이 내 발 밑에 다가왔다. 두어줄기의 물이었다. 아, 여기에도 틈이 있었구나.


2.
우리들이 쉽게 생각하기에 '직선과 곡선은 조화로울 수 없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아니, 어쩌면 '현실 속에서' 직선과 곡선이 혼재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없어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간단한 예를 들어 이 의문을 풀어보기로 했다. 옳지, 지금 내 눈 앞에 들어온 것은 머그잔 아래 깔아둔 작고 고운 두루마리 화장지의 한 칸. 이 화장지를 예로 들면, 각 칸은 네모의 꼴이 이어진 형태다. 하지만 요 조그만 녀석이 붙고 붙어서는 결국 동그란 화장지 한 롤이 된다. 그게 끝인가? 아니다! 그 녀석은 스물 네개 정도씩 한 묶음이 되어 다시 네모의 포장을 가진다. 한편 녀석들은 공장에서 무지무지 큰 펄프'롤'에서 끊겨나오기 때문에 녀석들의 조상이 '네모'인지 '동그라미'인지 (아니 어쩌면 세모나 팔각형일지) 알 수 없다. 눈 앞에 보이는, 물에 젖어 다시 쓸 수 없게 되버린 이런 녀석들조차 본질은 알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것이다.

하, 답답할 노릇이다. 답답하니 속이 아프다. 어떤, 신호같은 이 아픔.



3.
조그만 저 틈에서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준씨, 똥 덜 쌌어요? 왜 이렇게 오래걸려! 벌써 30분째라고!"






4.
끝.



4-1.
작가주, 화장실에는 과연 어떤 추억들이 있을까요. 가장 은밀한 공간이고 원초성을 담보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자기해방의 공간에서, 여러분은 어떤 감흥을 느끼시나요. 저에게는 두가지 은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드래곤볼'과의 조우입니다. 초등학교 3-4학년, 저는 의젓하고 성실하며 논설문과 고전읽기를 좋아하던 독서소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만화와 조우했고 아주 가끔이었지만 만화책을 열댓권씩 빌려 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종종 난폭한 만화를 빌려다보는 저를 좋아만하진 않으셨고 제가 없는 틈을 타 몰래 전부 반납해버리기도 했었습니다. 꾀를 낸 것이 바로 '화장실에서 만화보기'였어요. 킥킥대며 웃다가 화장실에서 바질 내리고 한시간이 넘게 앉아있다보면 엉덩이가 시린 것도 잊었죠. 그리고 조용히 바지 속에 책을 숨기고 얼른 제 방으로 뛰어 들어와 학원가방 속에 책을 넣고 뛰쳐나갔습니다. 물론, 엄마도 알고 계시긴 했겠지만요.
두번째는 군대에서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님의 첫편지를 받던  그 날, 잠자리에 누워 몰래 손전등을 켜고 어색한 아버지의 편지를 한글자씩 읽던 순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화장실에 들어가 '정말로' 주먹을 깨물면서 삼키던 눈물은 군생활 유일한 울음이었습니다. 억지로, 더럽히지도 않는 그 화장실에 들이붓듯 쏟은 락스냄새가 제 울음을 더욱 슬프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 냄새, 잊을수가 없어요.




가장 어두운 면이 가장 밝게 드러나기도 하고, 또한 가장 은밀한 면이 고스란히 숨겨진 원시의 사각형, 화장실. 당신들은 어떤 사각의 장소를 가지고 있나요. 당신들은 어떤 추억을 그 곳에서 만들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