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생존마감

[한글 뜯어먹記] 프롤로그, 소심남자 황선진의 글짓기 이야기

DkTheBlank 2012. 4. 1. 23:56



안녕하세요. 글짓는 황선진입니다. 아마튜-어스러운 글쓰기를 즐기는 제가 이런 코너를 어떻게 이어갈지, 많은 고민을 했으나 앞뒤가리기보다 첫 삽을 서둘러 뜨는 것이 진정한 아마튜-어스러움 아닐까 싶어 서둘러, 손이 닿는대로 적어보려 합니다. 저는 한글자모음을 소설화하여 연재하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우리말을, 많은 사람들이 여러 어휘로 잘 만들어 이어져 온 것을 왜 할 일 없이 분해하냐하시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만 분해하는 것은 제 어린 시절부터의 장기長技였어요. 시계나 카메라를 분해하거나 심지어 동생이 치는 피아노를 분해해보려다 어머니께 꿀밤을 맞기도 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손을 대도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알게 됩니다. 물론 타의에 의해서 말이죠. 저의 이런 조심스러움(어떤 이의 말에 의하면 소심함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이 섬세함!)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분해, 해체, 그리고 조립이라.

언어에 대한 분해를 처음 생각했던 것은 국민학교 (였다가 초등학교로 바뀐) 4학년 때의 일로 기억합니다. 어렸을 때 나름대로 책을 많이 읽는 학생이었지만 모르는 단어를 하나 하나 찾아볼만큼 섬세하거나 영특한 아이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국어사전과 친하게 지내진 않았죠. 그러던 어느날, 담임선생님은 어마어마한 숙제를 내주십니다. 국어사전에서 순한글로 이루어진 단어를 무려 백 개씩이나 찾아오는 어명이 떨어진거죠.


1주일의 기간이 주어졌고 1등을 한 친구에게는 문화상품권 1장을 주신다는 (당시에는 무지) 큰 선물까지 거셨기에 다음날 교실에서는 집에 국어사전이 있는 애들의 대경합이 시작됐습니다. 동아국어사전, 엣센스국어사전, 표준국어사전 등 모두 저마다 다른 커버였지만 처음부터 한 장 한 장 훑는 친구들의 모습에는 사뭇 비장함마저 감돌았구요. 당시는, 물론 여러분과 제가 나이 차이가 그리 나진 않을거라 생각합니다만, 네이버 지식검색이나 구글검색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었고 '숙제는 자기 힘으로 찾는 멋진 어린이'같은 착한 경쟁의식이 있던 시절이라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방과 후에 남아 고개를 책상에 푹 숙이고 사전을꼼꼼하게 뒤적이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어땠을까요? 아예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숙제가 나온 날, 집에 돌아가자마자 가방을 거실 쇼오파에 던져두고 곧장 집에 있던 국어사전을 꺼내들었습니다. 자간도 좁고 글자크기는 깨알같으며, 심지어 조금만 물기가 묻어도 그대로 찢어져버리던 그 하늘하늘하고 뭉툭한 책을 만지는 것 조차 저에게는 소름끼치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보여준 저 문화상품권만 있다면 15 소년 표류기나 그리스 신화 3권같은 책을, 빌리지 않고 내 것으로 가진 채 원없이 읽을 수 있다는 꿈을 잠시나마 꿨기에 어떻게 읽는 줄도 몰랐던 것을 처음부터 뒤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첫 장은 ㄱ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한글 자모의 첫째 글자. 기역이라 이르며, ‘가’에서와 같이 초성으로, ‘역’에서와 같이 종성으로 쓰인다.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혀뿌리를 높여연구개를 막았다가 뗄 때 나는 무성음이다. 초성일 때는 무성이나 모음 사이에서는 유성음이 되며, 종성일 때는 혀뿌리를 떼지 않고 발음한다.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이다.


무슨 이런 어려운 설명이 있는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첫 단어를 넘겨 다음 단어를 보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옆에 괄호에 한자가 없는 것은 '순우리말 단어가 아닐까?'하는 생각말이죠. 그렇다면 일단 ㄱ부터 ㅎ까지 자음으로만 벌써 스무개가 넘는 단어를 쓸 수 있었으니까요. 사전을 들고 어머니께 쪼르르 달려가 여쭈었더니 "그건 단어가 아니란다. 그건 뭐냐면..." 하시더니 잠시 사전을 뒤적거리신 후에 "그건 그냥 단어는 아니야. 다른 것으로 찾아보렴." 이라시며 사전을 다시 저에게 맡기셨죠. 물론 그냥보내셨다면 서운했겠지만 하나 힌트를 주셔서 더욱 신이 났었습니다. 그 힌트는 바로 이 것이었습니다.


"자, 아들 잘 봐. 여기 시옷에 펴보면... 시나브로라는 단어보이지? 여기 그래 여기, 다섯번째 줄부터 여덟번째 줄까지. 그리고 여기 마지막에뭐라고 써져있어? 그래, 순우리말. 순우리말 단어라고 써져있지? 근데 ㄱ에 봐보렴, 그런 표시 없지? 그럼 이건 순우리말 단어가 아닌거야. 이런 단어가 써져있는 것으로 찾으면 된다. 몇 개 찾아야된다고? 엄마랑 같이 찾아볼까? 백개? 아들, 먼저 찾고 있어. 엄마가 감자 쪄줄게."

그리고선 어머니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제 방으로 오시지 않으셨죠. 하지만 단어 맨 뒤에 '순우리말'을 찾는 저의 여정은 벌써 5개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가납사니, 가년스럽다, 가늠, 가루다, 가래다. ㄱ을 지나 가를 다 뒤지는 동안 저는 또다른 '꼼수'가 생각났습니다. 가에서 5개를 찾았으니 나에서 5개, 다에서 5개를 찾으면 100개는 금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부터 기까지를 한꺼번에지나친 저는, 후에 알게 되었지만 ㄱ(기역)은 ㅅ(시옷)과 ㅇ(이응)에 이어 (사전에서는) 순우리말이 가장 많은 자음 중에 하나였습니다, 바로 ㄴ에 돌입했습니다. 물론 허사의 시작이었죠.

겨우 '남새' 하나를 찾기까지 소비한 시간이 다시 삼십분이 넘었고 열한살, 어린 저는 집중력을 잃었습니다. 숙제는 이미 제 마음에서 떠났었고 왠지 모를 마음이 발동해 새로운 '재미 무언가'를 찾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냥, 순우리말 단어를 만드는 것이었죠. 그때쯤의  유행어나 인기있는 노래가사들을 찾아보았더니 사전에 없는 것'뿐'이었던 것이 단초였습니다. 이를테면 '꼬르륵', '뭇나(먹었니의 사투리죠. 이 때 한창 TV 프로그램에서 대사로 나왔었죠.)'같은 단어는 사전에도 없었기 때문에 '저런 단어를 모아보자.'고 생각했던 것이 '내가 만들어보자.'로 바뀌었습니다. 과학시간에도 알아서 잘 만들고 슬기로운 생활 시간에도 선생님께서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는게 중요해요.'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못 받아들인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삐쭉삐쭉 못난이


먼저, 저를 열받게 했던, 옆에 괄호 속에 한자가 쓰여진 '순우리말도 아닌 못생긴' 단어들을 몇 개 꺼냈습니다. 예를 들면 기와, 곡선 이런 단어를 꺼내다 글자단위로 분해해보았습니다. ㄱ,ㅣ,ㅇ,ㅗ,ㅏ 따위로 쪼개놓고서 이리로 저리로, 없을 것 같은 단어를 찾아 이리 저리로 단어를 옮겨보았습니다. 그래서 만든 단어가 '가외' 였습니다. 이제 단어는 하나 만들었겠고 뜻을 적는 칸이 남아있는데 도통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아 '기와의 한 종류, 지방마다 쓰임이 다를 수 있다.'고 채웠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촘스키[각주:1]같은 언어학자가 귀여워서 한대 쥐어박을만한 상상을 조그만 아이가 했으니 얼마나 웃길까, 하고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재미있는 단어'창조'놀이를 한 시간쯤 했을까요. 드디어 100개의 단어가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웠고 기쁜 나머지 저는, 엎드려서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하느님이라는 사람이 천지를 창조하고서 주말에 쉬었다고 하던데 '창조라는게 얼마나 어렵고 힘들고 귀찮은 것인지 알아요?'라고 말할 수 있던 삐쭉삐쭉한 어린이가 아니었나 싶어요, 저는.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학교로 뛰어가 이제 막 출근하는 선생님께 종이를 냈습니다. "아니, 벌써 다했니? 백개를?"하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리는 것을 그때는 왜 못봤었을까요. 기뻐서 얼른 교무실을 뛰쳐나오면서, 이제 막 학교에 도착하기 시작한 친구들을 향해 "야, 나 벌써 다했다! 나 냈다! 부럽지 부럽지!"를 외치던 저는, 하지만 4교시가 끝나고 5교시가 시작되도록 선생님께서 "자, 선진아.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이렇게 빨리 했니? 자, 4반 친구들, 선진이를 본받도록 하세요."라며 만원짜리 문화상품권을 딱 주실 줄 알았지만 선생님은 그날따라 (눈에 띄려고) 막 손을 들어 발표하려는 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시더라구요. 이상해서 수업이 다 마치고 선생님께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제 숙제 보셨어요?" 선생님은 순간 웃으시다가 조금 찡그리시다가 다시 살짝 미소만 띄우시다가 책상 서랍을 열어 문화상품권 한 장을 저에게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오래토록 남아있어요. "한번은 좋아. 다음번엔 안돼?"

하지만 선생님 몰래 다음의 그 다음, 그리고 그 다음에도 '하면 안되는 놀이'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고 있네요. 참 오래전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저를 혼내지 않고 그 창의력과 상상력을 인정해준 그 선생님이 있었기에 제가 글 속에서 사기도 치고 헛소리도 하며 소설을 짓고자 하는 아마튜어 작가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었어요. 만약 지금 제가 그렇게 숙제를 해서 낸다면 단번에 F학점을 받거나 선생님께 불려가 찢김을 당한 A4용지와, 더불어 찢어진 마음을 가질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단단합니다.

재미있는 시도가 될거에요, 기대해주세요. 그럼 프롤로그는 이 쯤에서 끝낼게요. 모두, 고맙습니다.

막간을 이용해, 이런 방식을 이용해 제가 만든 단어가 있답니다.

'갓삽 더미이 위솔고'

위의 문장(?)의 단어를 분해하면 새로운 단어의 조합을 만들 수 있어요.

SunJin.Hwang@hotmail.com 으로 정답을 보내주시거나 비밀댓글도 좋아요 :-)

추첨을 통해 다음 호 발간 때 소정의 상품을 드릴 예정입니다.

무려, 제 사비를 털어서요! 많이 응모해주세요 :)


<끝>


*별 거렁뱅이같은 소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소심한 녀석이냐구요? 절대 아닙니다. 실은 위에 쓴 내용 그 자체가 '프롤로그' 소설이거든요. 다음 호에는 'ㅙ. 불만철학자 왜 씨의 하루'가 연재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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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국의 가장 '중요한 지식인'으로 손꼽히며 언어학, 철학,정치학 등 활발한 학습과 교육, 발표를 하는 학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