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현 수
구정, 성룡이 돌아왔다
90년대 중반에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들을 꼽으라고 하면 10대 배우 안에 성룡은 반드시 들어갈 인물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캐빈과 함께"라면 "명절은 성룡과 함께"가 기본이었다. 90년대 후반 이후로 자취를 감추어버린 홍콩영화 전성기와 함께 많은 배우들이 사라졌지만 그 중에서도 살아남은 배우이기도 하다.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그가 찍은 최장수 시리즈이기도 하거니와, 앞서 이야기한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역시 매우 중요한 시리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위상의 작품으로 신작 '폴리스 스토리 2014'가 개봉했다.
홍콩영화의 전성기
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었던 영화들로 홍콩영화는 빼놓을 수 없었다. 한국영화가 쿼터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만큼 부진한 영화 시장은 헐리우드영화와 홍콩무협영화로 양분되었다. 그 시기 스크린을 사로잡았던 3대 배우가 바로 이연걸, 성룡, 주윤발이었다. 주윤발은 오우삼과 함께 홍콩느와르 장르를 독점했고, 이연걸은 정통무협을, 성룡은 주로 현대를 배경으로 한 무술활극을 자신의 것으로 확고히 굳혔다. 무술실력의 면에서 이연걸과 다른 노선을 선택해야 했던 성룡은 스스로가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무술 동작을 구상할 때에도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을 택했다 한다. 그런 성룡이었기에 '취권'이 그만큼 성공할 수 있기도 했다.
'무협'이라는 측면에서 이연걸과 대비되었다고 한다면, '헐리우드 영화의 변형'이라는 측면에서는 주윤발과 대비되었다. 홍콩느와르는 헐리우드식 느와르 장르에 무협에 가까운 총질을 넣어서 자신들의 것으로 수용했다. 성룡은 헐리우드식 액션 장르를 수용해 거기에 무술을 넣었다. 밀려오는 십수 명의 적들과 동시에 맞서고, 클라이막스 액션씬에서 늘 건물 한 채를 완전히 박살내는 씬이 들어가는 경향은 '용형호제', '프로젝트 A', '폴리스스토리' 등의 걸출한 작품에서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1
그러나 홍콩반환 시기를 지나면서 홍콩영화는 급격히 쇠락했고, 쟁쟁한 감독과 배우들은 살길을 모색해 헐리우드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필자의 견해로는 결국 다 실패로 끝났다.
<완연히 노쇄해 보이는 성룡. 이 장면은 일견 베인과 맞닥뜨린 배트맨을 연상시킨다. 사진 : 네이버 영화>
백인 사이의 동양원숭이들
그 무렵 헐리우드에서도 홍콩영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었다. '아메리칸 닌자' 시리즈로 닌자영화가 쏟아져나오는 가운데, 척 노리스나 장 클로드 반담, 그리고 스티븐 시걸은 무술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백인 우월주의가 상당했던 시기이니만큼 무술을 쓰더라도 서양인이 써야 하는 시점에서 반담과 노리스는 그에 잘 맞는 캐릭터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쓰는 비서양적 무술은 이내 조롱거리가 되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척 노리스 개그가 이에 대한 방증이다. 워낙에 그들의 무술이 무적으로 묘사가 되다 보니 [척 노리스는 푸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밀고 있는 것이다] 정도의 희화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2
홍콩영화 배우나 감독들이 헐리우드로 건너가면 수순처럼 자신들의 무술액션을 헐리우드식으로 만들어내어야만 했다. 헐리우드로 간 거의 모든 홍콩영화 감독들이 그 입성작의 배우로 장 클로드 반담을 택했다(택해야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우삼의 입성작인 '하드 타겟', 서극의 '더블팀', 임영동의 '맥시멈 리스크' 등이 모두 반담과의 작업이며 범작도 못 되는 수준으로 그쳐 버렸다. 서극은 이후로도 성공적인 안착에 실패해 버렸고, 오우삼은 '브로큰 애로우'나 '페이스 오프'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후 '페이첵', '윈드토커' 등의 잇단 실패로 지지부진한 수준에 머물렀다. 3
배우들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성룡과 이연걸이 헐리우드에서 찍은 작품들은 노리스나 반담, 시걸의 영화와 다를 것이 없었다. '동양에서 온, 무술을 쓰는 황인족의 신기한 개인기 퍼레이드'라는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어 상업적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본래 희극적인 요소가 강한 영화를 만들던 성룡은 이연걸에 비해 헐리우드의 분위기를 타기가 쉬웠을 것이다. '러시 아워' 시리즈의 상업적 성공은 성룡의 장기가 잘 먹힌 케이스이다. 이연걸은 그렇지 못했다. 캐릭터는 늘 과하게 진지했고, 무술은 늘 더 비현실적이었다. 홍콩영화계의 인물들이 헐리우드로 넘어가 만든 작품들은 그렇게 하나같이 서양인들 사이의 동양 원숭이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 '폴리스스토리 2014'에서는 총격씬이 너무 많이 나온다. 성룡은 몸인데. 사진 : 네이버 영화>
신 폴리스스토리와 폴리스스토리 2014
'살아남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그들이 홍콩으로 복귀했다는 부분 때문이다. 오우삼은 '적벽대전'으로 기사회생했다. 이연걸은 '무인 곽원갑'을 만들어 한풀이를 했고, 성룡은 '신 폴리스스토리'를 들고 왔다.
이번 글의 핵심 인물인 성룡에 집중하자면, '신 폴리스스토리'는 기존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를 생각하면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고, 성룡이 헐리우드에 가서 만든 작품들에 비하자면 걸물이었다. 가장 큰 요소로 코믹함이 사라졌다. 마치 헐리우드에서 이미 진이 다 빠져 버린 것처럼. 이전 시리즈에선 볼 수 없을 만큼 비극성이 강해진 신 폴리스 스토리에서는 영화 초반부터 주인공으로 인해 동료들이 모두 죽어나간다. 자신의 역량에 대한 자신감이 비참하게 꺾인 주인공의 기사회생담은 은연중에 뉴 폴리스스토리와 성룡의 정체성 자체를 상징하는 듯하다.
폴리스스토리 2014는 그에서 다시 달라졌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이 영화는 뉴 폴리스스토리에서 더 시간이 흘렀다. 견자단의 영화에서부터 특히 강세를 보인 초고속촬영 씬에서 성룡의 얼굴은 노쇄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성룡영화의 또 하나의 트레이드마크인 극도의 스턴트 씬 역시 없다. 화면과 촬영은 거친 느낌을 강하게 살린다.
폴리스스토리 시리즈의 감독들은 다 다른 이들이지만, 폴리스스토리는 감독의 영화라기보다 배우의 영화로 인식된다. 그래서 '성룡의 폴리스스토리'라고 부른다. 1편부터 3편까지는 주인공 캐릭터가 진가구이지만, 4편에서는 아예 인물 이름이 제키첸이라는 점은 이를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한다. 폴리스스토리에서 중요한 건 스토리의 치밀함과 탄탄함이라기보다 몸을 날리는 성룡의 액션과 돌직구로 선한 캐릭터성이다.
폴리스스토리 2014는 그런 궤에서 읽을 만하다. 종반장은 선함의 극치인 캐릭터이다. 이전보다 둔해진 감이 있어서 그렇지 그는 역시 우직하게 절대선의 캐릭터로 분했다. 치밀하지 못하고 다소 진부한 스토리 구성은 성룡 영화에서라면 우리가 용서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을 덮어줄 수 있는 성룡영화만의 매력이 이번 영화에서 부족한 건 사실이다(더불어 마지막 지하철 선로씬의 형편없이 엉성한 연출도 꽝).
<과거 회상씬들은 영화에 장면적으로나 액션 연출로나 다채로움을 부여하지만 스토리 상으로는 너무 군더더기였다. 너무 과하게 쓰인 상상 페이크 장면도 무리수. 하지만 성룡이 왔는데 뭘 더 바라겠는가. 사진 : 네이버 영화>
다시 성룡을 기대하다
전작들에 비해 아쉽다곤 할지언정 폴리스스토리 2014는 성룡의 복귀작으로 기대할 만한 작품이 아닐까. 비록 그의 모습은 중장년의 우직함으로 표현되었지만 현재 헐리우드에서부터 시작된 '황혼기'라는 트랜드로 생각해봐도 무리가 없다. 헐리우드로 갔던 이들이 홍콩영화계로 돌아가 작품활동을 하는 것도 반가움을 넘어서 당연히 그랬어야 할 일이다.
상대적으로 볼거리의 스펙터클이 부족하던 시절에 스크린을 뜨겁게 달구었던 성룡의 영화는 이렇게 제2의 시대를 맞으려 한다. '무간도'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한 홍콩 영화계의 모습은 아쉽지만 꾸준히 홍콩영화계를 지켜온 주성치, 견자단의 부각과 더불어 주윤발, 이연걸, 오우삼의 잇단 홍콩 복귀, 그리고 주걸륜, 사정봉, 고천락 등 기대할 만한 신예들의 등장 등에서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해볼 수 있을 듯하다. 적어도 '명절엔 성룡'이 돌아온 것만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 1) 헐리우드식 : 일단의 고전적 내러티브 영화들을 헐리우드식으로 통칭한다. 여기에서 특별히 국한하는 것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결합이다. 이 무렵(90년대 전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는 1인 영웅에서 2인 영웅 시스템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맞기 직전쯤에 해당했다. 게임 방식의 구성(중간보스와 끝판대장이 있는), 주인공 1인 대 절대적인 다수 악당의 대결구도, 단순화된 권선징악, 클라이막스의 대규모 폭발씬이 그것이다. 참고로 당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한 편 안에서 나오는 폭발씬의 횟수는 3-5회였다. 오우삼의 '브로큰 애로우'에서는 수류탄 2회, 헬리콥터 3회, 차량 2회, 기차 1회, 비행기 1회, 핵폭탄 1회로 총 10회의 폭발씬이 나왔다. [본문으로]
- 2) 척 노리스나 장 클로드 반담 : 이들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2012년 10월 이영화봐show 원고 ['익스펜더블 2'를 통해 본 헐리우드 액션 배우들의 계보]를 참고하시라. 링크는 다음과 같다. (http://www.bassak.co.kr/347) [본문으로]
- 3) 오우삼의 경우 : 오우삼이 헐리우드로 건너가서 제일 처음 만든 영화인 '하드 타겟'은 반담을 기용하여 헐리우드식 액션에 뛰고 나는 무술이 결합되었고, 당연지사로 실패했다. 이후 성공을 거둔 '브로큰 애로우'와 '페이스 오프'는 철저하게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영화를 자신의 촬영과 연출 기법으로 표현하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페이첵'과 '윈드 토커'는 스타의 부재, 연출의 지지부진함, 액션성 부족, 스토리의 진부함 등 실패할 만한 요소가 상당했다. 하지만 난 윈드 토커를 재미있게 본 사람 중 하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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