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 현 수
<Pentax MX, Fuji Autoauto 200, 올림픽공원>
펜탁스 MX를 손에 넣은 첫날, 나는 카메라를 들고 공원으로 나갔다.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시립미술관 앞길을 걸으면서 렌즈에 담아낼 수 있는 것들은 죄다 셔터를 눌러대었다.
SLR 카메라의 셔터음은 DSLR의 그것보다 훨씬 육중해서 셔터음만으로 아날로그 기계를 만진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찍고, 릴감개로 필름을 한 칸치 옮기고, 다시 찍는 과정의 그 번거로움은 그 자체로 가득한 매력이었다.
<Pentax MX, Fuji Autoauto 200, 진시장 인근 철길>
필름 사진에는 흰 빛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부연 막 같은 게 한 겹 쳐진 것 같은 느낌이 난다.
그 때문인지 필름 사진은 옛스러운 느낌이 강해진다. 혹은 어떤 은은하거나 신비한 느낌이 나기도 한다.
쨍하니 선명하기만 한 디지털 카메라들은 알 수 없는, 0과 1 사이의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 같다.
<Rollei 35SE, Kodak 200, 해운대 지하차도>
그러나 필름 사진들이 그저 희부옇게만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제대로 세팅이 되어 찍으면 필름 사진은 그 자체로 매우 진득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혼자 갔던 해운대 출사길에 앞을 걸어가던 소녀의 뒷모습은 필름 카메라 특유의 짙고 선명한 그림자로 남았다.
지하차도에서 내 앞을 걸어가던 두 소녀의 뒷모습을 롤라이는 고운 역광으로 잡아주었다.
<Pentax MX, Fuji Reala 100, 대전역>
필름 사진이란 디지털 카메라처럼 날카롭게 선명한 건 아니면서도 어떤 사실적인 느낌이 있다.
아웃포커싱조차 은은하다.
대전역에서 부산행 열차에 오르던 날, 오후 역사를 채운 부산한 걸음들이 역동적이게 담겼다.
사진을 찍는 일은 디지털 카메라가 훨씬 쉬운데 이런 느낌을 얻어내기란 어려운 것은 왜일까.
<Rollei 35SE, Fuji Reala 100, 예문여고>
디지털 카메라에서 사진의 질감을 결정하는 것은 카메라 본체의 브랜드와 렌즈의 성능 두 가지라면,
필름 카메라에서는 필름의 종류 또한 영향을 끼친다.
롤라이 35SE는 펜탁스 MX보다 색감을 더 붉고 선명하게 잡아낸다.
그리고 지금은 단종되어 버린 후지 리얼라 필름은 광원이 풍부한 낮의 풍경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는 필름으로 유명했다.
그들이 모두 제성능을 뿜어내어 하나의 사진이 만들어지는 것이니,
디지털 카메라가 따라올 수 없는 어떤 정성스러움이 어떤 필름 사진에든 들어있게 마련이다.
요즘 나오는 디지털 카메라들에 필름 모드가 추가되는 것은 필름에 대한 개성과 로망이 나 한사람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Pentax MX, Fuji Autoauto 200, 광주 금남로>
필름 사진을 찍는 것은 불편함과의 싸움이다.
한 롤에 정해진 컷수를 다 채우지 못하면 필름을 그만큼 제대로 다 활용하지 못하는데,
낮시간 동안 촬영한다 생각하고 감도 100짜리 필름을 카메라 안에 넣어두었다가 밤이 되면
감도가 낮은 이 필름은 빛을 충분히 빨아들이지 못해 사진이 흔들리기 십상이다.
필름값이 그리 저렴하지도 않다 보니 마구 셔터를 눌러댈 수도 없고,
그자리에서 바로 확인할 수 없으니 잘 나왔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다.
매 한 컷 한 컷을 찍을 때마다 부디 잘 찍혔기를 빌면서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고생스럽게 찍은 사진의 결과물이 내 기대 이상으로 나왔을 때의 뿌듯함은,
사진을 찍자마자 당장 결과물을 살펴보는 순간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Pentax MX, Fuji Reala 100, 다대포>
24롤 혹은 36롤 필름을 카메라 안에 넣고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 보면
다 찍지 못해 카메라 안에 필름을 그대로 두었다가 여러 날이 지나 마저 찍고 찾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사진을 찍던 순간을 잊고 있다가 현상하고 나서야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발견은 어딘지 새로우며, 잃어버린 어떤 귀한 것을 다시 찾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예전 동료 선생님과 다대포에 갔던 날.
바다를 향해 걸어가던 그날은 몹시도 쌀쌀했더랬다.
마치 렌즈가 추위에 얼어버린 것을 필름이 그대로 담아낸 것 같은 어떤 찡함이 사진에 남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과 목도리의 끝자락도, 희게 멀어지는 수평선의 끝자락도.
<Pentax MX, Kodak TMAX 400, 사직야구장>
컬러필름과는 다르게 흑백필름은 어떤 광경을 찍더라도 그 사진에 예스러움을 부여한다.
친구들을 따라 처음으로 야구장에 갔던 날.
흑백 필름에 야구장의 선명한 함성을 담아보았다.
현상 후의 사진 속에는 그날의 기억이 아주 오랜 시간 너머의 아름다움으로 맺혀 있었다.
나의 회상 속의 장면과는 달랐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Pentax MX, Kodak TMAX 400, 함평나비축제>
후지에 리얼라가 있다면 코닥에는 티맥스가 있다고 하던, 컬러와 흑백 필름의 양대산맥이었던 티맥스 400필름의 짙은 노이즈는
매우 역동적인 역광을 만들어내었다.
그 덕에 나는 함평나비축제에서 기적 같은 사진 한 장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필름 사진에서 뺴놓을 수 없는 매력이 바로 노이즈.
디지털카메라 사진에서 보는 보기 싫은 암부노이즈와는 다른 이 거친 입자의 이미지는
디지털이 아직 따라갈 수 없는 필름 사진만의 영역이다.
이 노이즈가 선명한 라인들을 뭉개어 버림으로써 경계를 따뜻하게 융화시키는 사진이 나오는 거다.
코닥과 후지에서는 잇따라 자신들의 명작이었던 필름들을 단종시켰다.
부산에서는 흑백필름을 현상할 곳이 없기에 서울로 보내면 일주일 정도 걸리면서 돈이 1만 원이 넘게 든다.
사진에서역시 아날로그는 디지털에 패배했다.
그러나 감성과 사랑은 아직 디지털보다 아날로그의 곁에 더 머물러 있다.
때로는 부옇고 은은하게, 떄로는 선명하고 진득하게 나오는 사진 속에서 날카롭지 않게 어루만지는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필름들만의 고유한 역량들이 있기에 그것만 잘 안다면 언제든 새로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도.
오래 전 시간의 추억과 더불어 우리가 편리함에 양보해버린 어떤 세상 속의 이야기가
이제는 시장에서 사라져가는 필름 사진 속에 아직도 남아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