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절찬리 생존중/[ 껍데기는 가라 ] 건축

도시의기억, 기억의도시

 

 

 

 

1

 

만날 다니는 길이 지겨워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마이 갓. 생각지도 못한 기억이 떠오른다. 이 길을 따라 다리 건너까지 친구를 바래다 주고, 친구는 다시 나를 바래다주고. 그렇게 몇번을 되풀이 했던. 훈훈했던 모범 어린이 시절의 추억.

 

우리동네에는 내가 세살 때 이사를 왔다. 그 때는 또랑 하나 지나던 촌구석이 큰 길도 나고 빌딩도 앉았다. 또랑 옆에는 폭신한 산책길도 깔았다. 참 마이 컸다 우리 동네도.

 

오늘 내일이 다르게 변하는 중에도 동네 구석구석은 옛날 모양이 남았다. 새 길, 새 집들 사이에 낯익은 장소가 언뜻거린다. 곳곳에 어릴 때 담가둔 기억이 익어간다. 김치같다. 익어가는 모양도 그렇고, 맛도 그렇다. 시큼하고 짭쪼롬하고. 꼬시고[각주:1], 맵고. 단 맛도 나는 것 같고.

 

이러니까 동네가 새 단장을 한다고 가림막을 치고, 보도블록을 까집고, 도로를 후비파고 하는 꼴을 보며는 기분이 좋지않다. 반짝반짝 새것 만들어 놔도 한순간 눈이 혹하고는 곧 찝찝해진다. 단 맛, 짠 맛이 헹구어진 도시에는 비릿한 쇳맛이 남는다.

 

2

 

개미집 / 개미는 이미 100만년도 전에 노동의 분화, 계급·노예제도를 이루어 놓았다.

 

도시는 열매 따먹고 사냥하고, 우가우가떠돌던 원시 인간을 머물러 살게 만든 인류의 발명품이다그래도 그냥 집 지어놓고 머물러 사는 게 도시의 전부는 아니다. 그정도는 동물[각주:2]도 한다.

 

루이스 멈포드[각주:3]는 '우가우가', 동물사회와 도시의 차이를 무덤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다음은 멈포드의 책 역사속의 도시에서 긁어온 내용이다. 옛날 책이라 말이 좀 어려운데, 일단 읽어보시라.

 

주의 깊게 만들어진 무덤 (은)... 중략 ... 사람들로 하여금 고정된 만남의 장소를 찾고 결국 지속적인 정주의 장소를 찾도록 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어떤 실제적 욕구보다 더 큰 역할을 하였다.”

 

봐라. 도시는 기억을 심고 거두기 위해 만들어졌다. 먹고 자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니까 사람들은, 도시를 만들어서 기억을 뿌리고, 그 기억을 중심으로 모이고 교류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기억의 저장고다.

 

그 기억의 저장고가 수백, 수천년을 지난 지금에, 우리는 얼마나 우가우가로부터 발전했나. 말도 안되는 기술의 발전으로 기억을 저장시킬 방법이 많아지니까, 이제는 도시의 기억을 밀어버리고 하드디스크에 집어넣고 있다. 매일 얼굴이 바뀌는 도시. 개인의 역사가 지워지는 도시는 얼마나 안락해졌나.

 

사람의 기억과 마음을 머물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는 몸을 머물게 하는 도시로 확장이 되었다가, 이제는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든다. - 누구는 부유(富裕:재산이많음)하게, 또 누구는 부유(浮游:떠다님)하게.

 

 

 

3

 

부유(富裕)하지 못한 우리는 모월 모일로부터 웃끼[각주:4]하나 매고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한 몸 정박시킬 곳이 마땅히 없다. 삼천 육백원. 아메리카노 한잔 값[각주:5]이 없으면 길바닥을 흐르는 사람들 속을 떠다니는 수밖에.

 

집에서 - 발 닦고 누워서부터 덜 깬 잠을 눈밑에 달고 나오기까지 - 8시간 중 깨어있는 한 두 시간, 중간중간 남들이 만들어준 목적지로의 짧은 여행을 빼고 남는 것은 온 종일의 표류인생이다.

 

그래서 마음의 닻을 내린다. 여기저기 기억을 심어 둔다. 몸이 표류할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부단한 노력. (아 오늘 이상하게 감성 돋네. 이 글은 훈훈한 글이 아닙니다. 혹시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나 이런 노력도 곧 무색해 지고 말 뿐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마음을 정박시키려는 노력이 헛된 일이 되는 것은. 변화하는 도시. 그 변화의 빠르기는 가히 보통의 인간이 사는 삶의 속도를 능가한다.

 

던져둔 기억의 씨앗 따위가 싹을 틔워 보기도 전에 밭을 갈아엎는, 이거슨 마치 고3이 되자마자 대학생이 되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애를 키워 아빠·엄마가 되었다가 할머니·할아버지가 되는 그런 속도.

 

오늘도 새 건물이 오르고 길이 난다. 기억의 닻은 풀리고 사진 한 장 달랑 남는다. 셀카 많이들 찍어두시라. 찍을 때 브이자 손가락 두 개에 얼굴만 찍지 말고 배경도 좀 남기고 찍기를 권한다.

 

 

 

  1. - 고소하고 - [본문으로]
  2. - 비버, 벌, 개미 같은 동물들도 집단 사회를 구성하고 집을 지어 산다. - [본문으로]
  3. - Lewis Mumford(1895~1990) : 미쿡의 도시계획가, 문화비평가 - [본문으로]
  4. - 물놀이 용 튜브. 바람 불어넣는. 우리 동네에서는 ‘주부’라고도 부릅니다. - [본문으로]
  5. - 아니 내가 자꾸 돈 이야기 한다고 타박하는 아저씨, 잔소리 그만 하시고 [추천]이나 좀 눌러 주세요. - [본문으로]

'+절찬리 생존중 > [ 껍데기는 가라 ] 건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원룸에서 잃어버린 것들  (1) 2012.09.06
만원 사회  (1) 2012.07.05
규모의 건축  (1) 2012.06.05
콘크리트 이야기  (6) 2012.04.01
건축 이야기  (6) 2012.02.29